2023년 여름은 유례없이 많은 비가 내렸다.
아이와 같이 유치원으로 가는 길. 그날도 우리 손에는 우산이 들려졌다.
나뭇잎, 과자 봉지, 빈 플라스틱 물병으로 막힌 배수로에서 물이 울컥울컥 역류했다. 아이는 ‘분수 같다’고 했고, 왜 물이 솟아오르는지 호기심 어린 궁금증을 가졌다.
그렇게 많은 비는 7, 8월 내 우리의 일상이었다. 모처럼 주말임에도 비를 피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이러다 우리 마을이 물에 잠기는 거 아니야?” 엉뚱한 말을 건네며 「도시에 물이 차올라요」 그림책을 꺼내 든 아빠를 보더니 별가루가 흥미를 보였다.
환경 문제를 다룬 「도시에 물이 차올라요」
「도시에 물이 차올라요」 그림책의 저자 마리아호 일러스트라호 (Mariajo Ilustrajo)는 스페인에서 일러스트를 공부하고, 영국과 인도에서 목탄 작업 및 디자인 활동에 대한 이력이 있다.
그 후 그림책 작가에 도전해 영국의 러스킨 대학에서 아동 도서 일러스트에 대한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이런 배경과 노력 끝에 탄생한 그의 첫 번째 그림책이 「도시에 물이 차올라요」이다.
책은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로 도시에 물이 차게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단 그 문제에 직면한 동물들의 안일한 태도, 그러다 일이 커지자 뒤늦게 이를 해결하려는 동물들의 노력,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어 마침내 많은 동물이 협력해서 물에 잠긴 도시를 구하는 장면을 담아내고 있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 닥친 당장의 현실을 대변하는 듯하다.
「도시에 물이 차올라요」를 보며 극지방의 빙하가 녹는 것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해마다 해수면은 상승하고 이상 기온은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2023년의 우리에게 찾아온 폭우처럼.)
정작 그로 인해 해를 입는 남·북극의 동물들은 그들 스스로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한다.
책은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현실의 우리는 책의 결말처럼 협동을 통해 그 문제를 헤쳐 나가지 못하고 있다. 작가는 엔딩에 그린 동물들처럼 우리 또한 당면한 위기를 잘 해소하길 바라는 듯하다.
아빠가 느낀 「도시에 물이 차올라요」 감상 포인트
별가루가 책에 관심을 보인 건, ‘도시에 물이 차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아마 어른들이 아포칼립스 장르의 재난 영화에서 기대하는 재미처럼.)
조금 물이 차올랐을 때 동물들은 대수롭지 않았다. 오히려 예쁜 장화를 신을 수 있어 좋아했다.
별가루도 새로 산 피카츄 장화를 자랑하고 싶어, 비가 오지 않는데도 유치원에 갈 때 몇 번 신으려 시도했었다. (책을 읽으며 동물들의 마음을 잘 헤아렸을 듯.)
학교 교실에도 물이 차오르자 어린 동물들은 물장난하며 처음 겪는 해프닝에 재밌어한다.
시간이 더 지나 제법 물이 차오르자 작은 동물들은 큰 위협을 느낀다. 하지만 곰, 기린 같은 큰 동물들에겐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문제였다.
나는 그림책의 이런 장면들이 너무 현실처럼 와 닿아 씁쓸했다.
올해 여름은 폭우란 이슈만큼 폭염 또한 화제였다. 오랜 시간 동결되었던 (소액 인상되었던) 전기세가 올해 많이 올라서 무더위에 더 이목이 집중되었다.
올해도 쪽방 촌의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들지 않는다.
정부와 지자체에서 예산을 들여 에어컨을 무상 공급해주었지만, 그들에겐 그것을 운영할 여유가 없다.
반면 나는 전기요금이 부담되지만, 무더위를 피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했다. 에어컨 사용을 아끼지 않았다. (더위를 무척 타다 보니 참고 싶지 않았다.) 내가 덥지 않으니, 자연스레 에어컨 사용이 어려운 타인을 헤아리지 못했다.
도시가 물에 잠기는 동안 작은 동물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직 버틸만한 큰 동물들은 작은 동물들의 아우성이 별나다고 여긴다.
얼마 뒤, 자신들의 턱 밑까지 물이 차오르자 큰 동물들도 공통된 위기의식을 공유하게 된다. 그래도 그림책의 동물들의 협력은 다행이다.
조금 늦되지만, 위기 앞에 하나로 뭉친고 해피엔딩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까지 하니 말이다.
아이의 그림책을 읽고 느낀 아빠의 시니컬한 감상이다.
아이의 대답은 ‘도시에 주스가 차오르면 어때?!’
별가루는 처음 보는 동화책을 음미하듯 그림을 탐독한다. 「도시에 물이 차올라요」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이 찬 도시를 작은 배에 의지해서 떠도는 생쥐들을 구해서 자기 어깨를 내어주는 곰을 보고 착한 친구라고 한다. (현실에서도 선의로 타인을 살피는 이들이 있다는 걸 말해주려다 감상을 방해할까 봐 그만두었다.)
또 수중 환경에서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는 수달(비버 인가?) 같은 동물들을 발견하곤 이 친구들은 더 재밌게 지낼 수 있다고 한다. (글을 읽기 바쁜 아빠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장면이었다. 아이 특유의 관찰력으로 그림 구석구석의 재밌는 포인트를 찾아냈다.)
책을 다 읽고 아이에게 ‘독후 활동’을 위한 다분히 의도적인 물음을 건넸다. “우리 마을에도 계속 비가 오잖아. 그림책처럼 물이 차오르면 어떨까?”
아이는 구명조끼를 입고 수영장에서 헤엄치며 놀던 기억을 떠올려, 자신은 수영을 잘하니 괜찮다고 한다.
그러면서 “근데 아빠, 나는 우리 마을에 주스가 차오르면 좋을 것 같아.”라는 엉뚱하고도 재밌는 답을 들려준다.
나는 웃으며 아빠랑 같이 주스를 실컷 마시면 되겠며고 억지스러운 ‘독후 활동’을 끝낸다.
조금 씁쓸한 맛을 느꼈던 「도시에 물이 차올라요」는 아이의 재미난 대답으로 달콤쌉쌀하게 와 닿은 책이 되었다.
환경에 관한 주제는 당장의 사는 문제와 조금 떨어져 있는 이야기라서, 그동안 등한시했다. (마냥 모른체 할 수 없는 이야기는 틀림없다.)
환경을 이야기하는 그림책에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그래도 「도시에 물이 차올라요」처럼 재치 있게 그려진 책이라면 (아이가 재밌어하는 책이라면), 중간중간 다른 책들 사이에 같이 읽는 책으로 준비하는 것도 좋다는 생각을 해본다.